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공격적 방어 정책 ==== 귀족들을 굴복시킨 바실리오스 2세는 동방 원정을 중지하였다. 그는 재위 초반의 내전으로 군벌 귀족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동방 원정을 통해 그들의 세력을 불리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전통적인 '''공격적 방어''' 정책을 재확인했다. 이는 즉, 적극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지는 않으나 주변 적국들에게 제국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파티마 왕조]]의 예가 가장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991년 파티마 왕조가 제국의 보호령이던 베로에아(현 [[시리아]]의 [[알레포]])의 함단 왕조를 침공하자 즉각 개입하여 1000년 휴전할 때까지 전쟁을 벌인 것이다. 호되게 당한 파티마 왕조는 휴전 이후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를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기독교를 박해하여 제국의 어그로를 끄는 등 적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더이상 알레포에 기웃거리지 못했다. 또한 바실리오스 2세는 제국의 유럽 영토를 위협하던 숙적 [[불가리아 제1제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한때[* 불가리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던 [[시메온 1세]](재위: 893 ~ 927) 시절.] [[황제]]([[카이사르]]) 칭호[* 엄밀히 말해 당시 불가리아 제국에게 인정한 칭호는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 [[바실레프스]]가 아니라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서로마 제국 멸망 이전의 완전한 로마 제국은 물론 이후의 동로마 제국에서도 앞서 언급한 3개의 황제 칭호보다 낮은 격의 칭호였다. 보통 공동 황제로 임명된 경우, 차기 황위계승자가 부제로 임명된 경우 카이사르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또한 불가리아 민족 한정 범위의 황제 칭호일뿐이지 로마 황제 칭호는 절대 넘보지 못하게 억제했다.]까지 허락받으며 수도 [[오흐리드]]에 총대주교구까지 설치했던 불가리아 제1제국은 완전히 해체되고 여러 개의 [[테마 제도|테마]]로 편입되고 말았다. 또한 제국의 동쪽 아르메니아 고원 일대의 군소 왕국들을 합병하여 당시 막 떠오르던 신흥 세력 [[셀주크 제국]]를 견제하고자 노력했다. 국가 내적으로 바실리오스 2세는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 시절을 거치며 세력을 더한 귀족가문들과의 대결에서 이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와 12세기에 제국은 문화, 문명 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인구만 해도 700만에서 1200만으로 증가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